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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 박사의 한국장로교 통사(通史) 14

[ 2013-07-29 17:58:36]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16일에 한국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885년 1월에 도쿄에 도착하였다. 도쿄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이수정에게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으로 향할 때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하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갈 때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러 부부와 동행하여 한국 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간 젊은 선교사의 뜨거운 열의는 이 땅에 복음의 역사를 잉태케 하였다.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경.

부활절인 이 날은 한국의 역사에 경이롭게 기록되어야 할 날이다. 한국 선교의 위대한 꿈을 안고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흔히 전해오는 이야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부부는 서로 누가 먼저 상륙했다는 차이를 남기지 않기 위해 세 사람이 손을 잡고 같이 뛰어내렸다고 하나 누가 먼저 뛰어내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 땅에 '함께' 왔다.

아펜셀러는 '이 날 무덤의 문을 깨치신 그리스도께서 빛과 자유를 이 나라에 가져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부활절에 선교사들이 입국한 것같이 이 땅에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그들은 기도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정세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이 있은 지 5개월 후였고, 명성황후 일파의 보수파 정권이 수립되어 있었다. 청(淸) 나라의 원세개가 통상사무 전권위원으로 서울에 남아 한국의 국정을 간섭하고 있었다. 또 일본은 그들대로 1885년 1월 9일에 한성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켰으며, 1885년 8월 20일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청나라와 일본 못지 않게 러시아도 한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이것은 그들 고유의 남진(南進)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당시 외교 고문으로 있던 묄렌돌프(Mo>llendorf)의 알선으로 베이징 러시아 공사관 서기 웨베르(Waeber)가 한국에 와서 1886년 8월에 고종에게 신임장을 바치고 '부령(富寧)을 러시아에 개방하고 만일 다른 나라와의 분쟁이 있을 때에는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하여 도와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러한 청원은 친청파인 민영익, 김윤식 등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러시아는 1888년 7월에 한국과 육로통상조약을 맺어 양국간의 국경 무역의 자유와 경흥을 러시아에 개방하였다. 러시아가 한국에 대하여 세력을 강화하자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아오던 영국이 1885년에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를 강제로 점령하여 포대를 쌓고 병영을 세워 러시아 동양함대의 통로인 대한해협을 위협하였다.

한반도를 중심한 국제 정세는 너무나 소란하였다. 일․청․러․영국 등 세계 열강들은 한국에 자기들의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살벌한 분위기가 연속되었다. 이때 선교사들이 상륙하였으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는 한국의 정세가 미국 여자가 머물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보고 아펜셀러 부부는 일본에 가서 사태를 관망하기를 권고하였고, 아펜셀러는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한국의 정세가 안정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1885년 4월 12일에 천진조약이 체결되어 청일 양국은 4개월 이내에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하므로 한국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6월 초에 아펜셀러 부부는 한국으로 왔다.

아펠셀러는 짧은 생애를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58년 2월 6일에 미국 펜실바니아주 손덜튼(Son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독일 개혁교회 계통에 속해 있었다. 아펜셀러는 1876년 10월 6일에 구원을 체험하였으나 프랭크린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 시절에 감리교로 교적을 옮겼다. 1882년 이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주의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신학교 시절에는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일본을 선교지로 삼아 기도하였다.

그의 동급생 중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워즈워드(J.S. Wardworth)가 가정 사정으로 한국 선교를 포기하였을 때에 아펜셀러는 친구를 대신하여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이 일은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883년 3월 10~28일에 커네티커트주 하드포드(Hardford)에서 신학교 연합회가 회집되었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여기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진로를 위해 기도하고 결심한 것이 있었다. <계속>

김남식박사(한국장로교역사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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