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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 박사의 한국장로교 통사(通史) 13

[ 2013-04-30 11:51:38]

 

이 사건으로 인해 알렌은 깊은 회의에 잠겼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聲)가 부임하기도 전에 명성황후에게 천거하고 신임을 받게 한 장본인이 자기이기에 아무리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고 해도 타국의 황후를 살해하는 대역의 죄악을 볼 때 그는 전율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 사건에 대하여 변명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노대국(老大國)인 청국을 무찔렀다. 이러한 일본의 기세에 세계의 강국들은 우호의 손길을 맞잡았다.

러시아의 남진정책(南進政策)을 막기 위하여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고, 미국은 한미수호조약의 조문보다 동양의 새로운 강자인 일본과 밀착되었고, 일본의 변명문이 지극히 만족한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을 위하여 자진하여 공개보도를 알선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알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국제정치가 비정(非情)하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을까고 생각하였다. 알렌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란 일본 공사관의 계획에 의하여 진행된 것이라고 본국 정부에 계속하여 보고서를 보내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알렌은 본국 정부를 상대로 대 일본(對日本)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또 한국 정부의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金允植)에게 명성황후 살해범의 처벌을 요구하였고, 일본의 압력에 의해 명성황후를 서민으로 격하(格下)시킨 것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알렌은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교정책이 현지 선교사들의 견해 차이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선교정책에 있어서도 극히 신중하였고, 국법을 범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한국 정부는 1888년에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오늘의 명동(明洞)에 땅을 비밀리 매수하고 궁실보다 높은 성당을 짓는 데 자극받아 발표되었다. 이 같은 금교령이 발표되자 알렌은 순회 선교여행을 간 언더우드 목사를 소환하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순회 선교여행을 하지 말며 의료사업과 교육에 치중하라고 권고하였다.

알렌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에 나와있는 선교사들에게서 많은 반발을 받았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알렌을 매우 싫어하였고 게일(奇一, Gale) 선교사는 󰡒내 생각에는 알렌의 이름을 선교사의 명부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알렌은 1905년 한국을 떠났다. 그의 20년간의 활동은 공로와 반발이라는 두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으나 그가 '한국 선교의 세례 요한'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4. 언더우드의 입국

 

알렌의 뒤를 이어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한 사람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목사와 아펜셀러(Henry Gerhart Appenzeller) 목사였다.

한국의 첫 선교사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알렌 박사가 선교사 자격이 아니라 의사로 입국하였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최초의 선교사로 보는 일반적 견해도 있다. 또 알렌은 선교사로 일을 계속하지 아니하고 외교관으로 정치 일선에 가담하였고, 한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 열의에 불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지하였기에 선교사로서의 그의 공로가 가리워지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알렌은 당시 상황에서 의사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근본적 신분은 선교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1859년 7월 1일에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때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1881년에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1884년에 뉴저지주에 있는 뉴 부른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신학교는 미국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였고,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한 베어벡(G. F. Verbeck) 선교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신학교 재학 때부터 인도 선교사를 지원하였고,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하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준비는 매우 치밀하였는데 인도와 같은 더운 지방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의학 상식이 필요하기에 1년 동안 병원에서 임상실습을 할 정도였다.

언더우드가 인도 선교 지망에서 한국으로 그 방향을 바꾼 동기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자료는 언더우드 자신의 수기(手記)일 것이다. 그가 헌신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82년과 83년 겨울 사이에 지금은 도쿄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계시지만 그때에는 학생의 한 사람이었던 알버트 올트만(Albert Oltman) 박사가 뉴 부른스위크 신학교에서 선교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마침내 조약을 맺어 서방 제국에 문호를 개방한 은자의 나라(한국)에 대한 글을 읽기 시작했다.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2천 2,3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문호가 열리기를 기도하는 교회, 1882년 슈펠트 제독에 의하여 조약을 맺고 문호가 열렸으나 교회측에서는 1년 이상이 지나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기에 자기라도 나서서 그곳으로 갈 사람을 찾아보려고 결심했다는 소박한 이야기이다.

나 스스로는 인도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다. 또한 이러한 확신으로 특별한 준비를 하였고 1년간 의학 공부도 하였다. 그래도 누군가 한국에 가야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겠다고 나는 분명히 느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년이 지났다. 아무도 한국에 가려고 지망하지 않았다. 어느 교회도 한국에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각 교파의 외국 선교부의 지도자들까지도 한국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때에 󰡒왜 너 자신이 못 가느냐?󰡓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인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의 특수한 소명 그리고 부분적으로 지금까지 준비해온 모든 것을 막는 것 같았다. 문은 다 닫혀졌고, 그중 어느 하나도 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두 번이나 나는 나의 교회에 한국 선교를 청원했으나 재정 문제로 거절되었다. 장로교 총회 본부에 두 번 청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헛된 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 선교의 문은 닫혀진 것 같았다. 내가 미국에 머물든지 인도로 가든지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것이었다. 결국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저주저 하면서 뉴욕의 어느 교회의 청빙을 수락한다는 편지를 써서 편지함에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한 음성을 들었다. '어느 누구도 한국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 가면 어떤가?'라는 음성이었다.

부치려던 편지를 집어 넣고 한국으로 가려는 시도를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나는 옛 장로교 선교부가 있는 중앙로 22번지를 찾았다. 전에 있던 총무가 그만 두었고 엘린우드(F. F. Ellinwood) 박사가 총무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긍정적 관심을 표시하였고, 며칠 후에는 다음 이사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될 것이라는 연락을 해 주었다.』 <계속>

 

김남식박사(한국장로교역사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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