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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 박사의 한국장로교 통사(通史) 10

[ 2013-02-19 09:48:28]

 

당시 국내에서도 젊은 개화파를 중심으로 서양문물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사유람단 혹은 정부 파견 유학생들로서 외국의 문물을 직접 보았기에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선교의 문은 열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에서 헌신할 일꾼들을 찾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미 성경 반포를 통해 전초 작업이 이루어진 곳에 선교의 불길을 일으킬 역군들의 손길이 기다려지는 시기였다.

일본과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선교 잡지를 통해 기고하거나 그들의 선교본부를 향해 한국 선교의 시작을 요청하는 편지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미국교회 안에서도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선교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갔다.

1882년에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주미 전권대사에 민영익(閔泳翊)이 파견되었고,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이 수행원이 되어 1883년 6월에 미국으로 갔다.

한국의 외교관들은 워싱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아서(Auther)를 예방하고, 서부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볼티모어 가우쳐 대학 학장인 존 가우쳐(John F. Gaucher)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쳐 박사는 이들을 통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게 되고, 한국 선교의 시작을 위하여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2,000달러를 헌금하면서 한국 선교를 호소하였다. 또한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맥클레이 목사에게 편지하여 한국의 현지 사정과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여 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민영익은 1883년 11월 27일 미국 뉴욕에서 도쿄대학(東京大學) 교수로 있던 그리피스(W.E. Griffis)를 만나 한국에 관하여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또한 게일(James S. Gale, 奇一)과도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영익은 이들에게 한국 선교를 호소하며, 한국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국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다른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겠으나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국 선교를 위한 '마케도니아인의 손짓'이 여러 곳에서 있었으나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한국 선교를 주저하며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가우쳐 박사가 2,000달러를 헌금하며 한국 선교를 호소하였을 때에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소극적이었다. 또 일본에 주재하던 장로교 선교사인 조지 낙스(George W. Knox) 목사와 한국인 이수정이 한국 선교를 호소했을 때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고, 선교부 관계자들 사이에도 상반된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미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한국 선교를 주저한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이 새로운 선교지임을 확신하면서 선교사들을 투입하기를 주저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한국의 정세 문제였다. 천주교회의 박해 소식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근 1세기가 되어가던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얼룩진 고통의 역사였다. 또한 1866년의 병인교난(丙寅敎亂) 때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이나 순교의 제물이 된 역사를 알고 있었고, 이에 격노한 프랑스는 로즈(Pierre Go Rose) 제독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함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공격하려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 선교사들을 한국에 투입한다는 것은 죽음의 자리에 이들을 몰아넣는 격이었고,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니 선교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 열강들과 통상수호 조약을 맺었다.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영토 분쟁이 있었으나 오직 미국과는 영토 문제로 인한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계속>

김남식박사(한국장로교역사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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