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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잊혀진 33년 선교사역의 현장탐방

[ 2012-08-31 15:27:52]

 

< 이대영선교사 >

33년간 역경 속에서 선교사역 감당해

주민 95% 예수 믿는 열매들을 발견할 수 있어

산동선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 시급

선교의 불씨를 다시금 지피는 노력 필요해

 

총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의 미래를 전망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본사에서는 중국 산동성에서 33년간(1922~1955년) 선교사로 사역한 이대영 목사의 발자취를 추적하려 특별취재단을 구성하고 8월 20~24일까지 산동성 여러 곳을 탐방하였다. 잊혀진 선교사인 이대영 목사의 자취를 통해 우리의 선교역사를 다시금 정리하려고 한다. 지명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한글식으로 한다. (편집자 註)

 

 

□본사 산동성 특별취재반□

 

김만규목사 (본보 발행인) / 김남식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회장) / ․장영학목사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관장)

 

 

 

폭우를 헤치며

 

다시 산동성으로 간다. 우리의 선배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그리며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 우리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올해에만 두 번째 방문이다.

호우주의보가 내린 서울의 새벽은 어둡기만 하였다. 오전 8시3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꼭두 새벽에 폭우를 헤치며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왜 그렇게 열심을 내느냐?고 묻기로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선교역사를 바로 정리해야 할 열망 때문이다.

기독교 계통의 일간신문에 산동성 선교 100주년 특별기획으로 15회 정도 연재기사가 나갔다. 기획이나 필자들의 노고에 감사하지만 필자의 마음에는 아쉬움만이 있었다. 그것은 편향된 역사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기사 가운데 '이대영 선교사'란 이름이 딱 한 번 나온다.

이대영 선교사. 그는 33년간 산동성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한국 선교사 가운데 가장 오래 헌신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에 이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필자에게 주어졌다.

 

래양 지역에서

 

땅에는 폭우가 내리는데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나르니 거기에는 햇빛이 찬란하였다. 인생이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고통의 바람이 불어올지라도 이것을 뚫고 하늘 가까이 간다면 그곳에는 소망의 빛이 있으리라.

한 시간 반 남짓하여 청도(靑島)에 도착하였다. 이번 탐방의 안내를 맡아줄 한인 선교사가 공항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사역하면서 한국 선교사들의 역사자료를 찾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산동성은 인구 1억이 되는 거대한 지역으로 한국 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연태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랄 쉬만 호를 타고 평양으로 갔고, 그곳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또 네비우스가 사역한 곳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래양기독교회였다. 래양은 한국 선교사가 부임하면 처음으로 가는 곳이며 그곳에서 언어훈련을 받고 문화 적응훈련을 받는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중국 산동성에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5월에 박태로 선교사 등이 현지 사정을 살피려 래양에 왔었고, 그해 겨울에 선교사들이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역했던 흔적은 사라지고 빈터만이 있으며 도시 개발로 인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이 큰 아쉬움이었다.

래양기독교회를 찾으니 '교회 주임'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천 명이 주일마다 회집하는 교회에 목사가 없고 󰡐주임󰡑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국 교회에 있었던 '영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제도이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연립빌딩 2,3,4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땅을 마련하였고 건축허가가 나오는대로 예배당 건축을 하리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풍성한 오찬과 과일을 준비하여 성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들과 귀한 교제를 가지며 앞으로 이곳을 배경으로 선교 영역을 확장해 나가야 할 꿈을 꾸었다.

우리는 이대영 선교사의 연고지를 찾아다녔다. 이대영 목사는 처음 래양에 와서 10개월을 머물며 중국어를 배웠고, 그중 2개월은 래양 화동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가 래양 인근에 교회를 개척하여 그 교회가 오늘에까지 오고 있다(이대영 목사는 1935년부터 이 학교의 교장으로 수고하였다).

우리가 방문했던 중국인 교회는 낡고 힘들어 보였다. 현지 중국인 목사 두 분의 안내로 그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2~30명의 교인들이 모이고 82세의 노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이대영 목사의 제자였다는 분의 묘비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여 허리까지 오는 잡초를 헤치고 길이 없는 들판을 헤메다가 겨우 묘비를 찾았다. 필자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잡초 속에 있는 묘비를 사진 찍기 위해 잡초를 헤쳐야 했다. 그러나 이분이 이대영 목사의 산동성 사역 첫 열매라고 생각하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중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내서(來西)기독교회를 방문하니 마침 한국에서 강사가 와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중국 교우들의 열정은 마치 1907년의 부흥운동을 연상케 하였다.

 

 

 

지모(卽墨) 지역에서

 

둘째날, 이곳에는 비가 내렸다. 우리는 빗길을 헤치고 이대영 선교사의 평생 사역지인 지모 지역을 탐방하였다.

먼저, 지모기독교회를 찾아 인사하고 중국인 목사 2명의 안내를 받으며 이대영의 자취를 찾았다.

처음으로 간 곳이 이대영 목사의 선교센터였다. 󰡐선도당󰡑이란 이름으로 1927년에 설립되었다. 버려져 폐허가 되어가는 건물이나 골조는 뚜렷하고 검은 벽돌 건물은 그 당시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박상순 선교사와 이대영 선교사가 사역하였다.

이 건물은 문화혁명 이후 정부로부터 돌려받아 지금은 중국 삼자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건물 안은 쓰레기 더미였고 유리창들은 깨어져 있었다.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건물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다. 내년이면 산동선교 100주년이 된다. 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선교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총회 차원에서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 가능한 일이기에 우리의 힘을 모으면 되리라고 본다.

우리는 이대영 선교사의 사택을 찾았다. 모수강(墨水江)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이대영 선교사의 사역센터가 있었다. 지모시 신의가 105번지와 107번지의 검은 벽돌 2층 건물이다. 한쪽은 의료센터, 다른 한쪽은 학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인 광고회사 '信義齊'가 사용하고 있었다. 큰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이 이대영 사역의 중심지였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고 건물을 돌아보고 있으니 중국인들이 의아스럽게 쳐다본다.

그곳에서 70미터 정도 가니 이대영 선교사가 살았던 집이 있었다(지모시 신의가 71번지). 검은 벽돌 2층 건물이었다. 다른 중국인이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 '우리 선교사'가 땀과 눈물을 흘렸으리라.

선교센터, 학교와 병원, 사택 이 세 건물은 검은 벽돌로 지어졌다. 하나의 사역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지금도 시장통의 철벅거리는 도로인데 90년 전의 우리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그곳에서 바라보면 모수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황해 바다로 흐르는 그 강을 따라 우리의 선배들은 눈물의 강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 탐방에서 세 건물을 찾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우리를 현지 선교사와 4명의 중국인 목사가 안내하였다. 󰡐우리 모두의 일󰡑이기에 그들도 비를 맞으며 우리와 함께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가? 우리의 조상, 우리의 선배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청도(靑島) 지역에서

 

셋째날, 청도의 아침은 맑았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싱그러웠다. 이대영 선교사와 방지일 선교사의 선교센터를 찾았다. 청도시 시남구(市南區)의 단동로(丹東路)와 합강로(合江路)가 만나는 코너에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지역으로 변하였는데 이곳에 조선장로교 청도 선교본부가 있었다.

그 아파트 2층에 사는 85세 된 중국 교인을 만났다. 그는 방지일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 사람이었고, 방지일 목사 사모님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그에게서 옛 이야기를 듣는다. 이 아파트 1층에 이대영 선교사가 살았고, 2층에 방지일 선교사가 살았다고 한다. 방 목사가 살았던 그 방에 노인이 살고 있고, 좁은 방에 앉아 그 노인과 대화하니 옛날 방지일 선교사의 모습이 회상된다.

일제말에 우리 선교사들은 모진 고통을 당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방지일 선교사는 수용소에 갇히고, 이대영 선교사는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조선의 총회본부의 노력으로 계속 체류할 수 있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우리 선교사들은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청도한인교민회를 조직하여 이대영 선교사가 회장이 되었다. 또 한국학교를 세웠는데 이 선교사가 이사장, 방 선교사가 교장으로 한국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아쉬운 것은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와서 그곳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다시 청도 동북부에 있는 남북령(南北嶺)교회를 찾았다. 이곳은 150여 세대가 사는 마을로 인구의 95%가 예수를 믿는 신앙공동체이다. 그 마을 중앙에 멋진 석조 예배당이 있었다. 청도 구급(區級)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이 교회는 미국 북장로교의 헌터 코벳(Hunter Corbett) 선교사가 설립하였고 이대영 선교사가 설교봉사를 한 곳이다. 이대영 선교사의 사역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곳을 찾아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이대영 목사의 신앙 유산이 남북령 마을주민 95%를 예수 믿게 하였다.

1922~1955년. 이것이 이대영 선교사의 산동선교 사역의 기간이다. 33년의 세월을 중국을 위해 사역하였는데, 우리는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산동선교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우리의 선배들의 자취를 다시금 찾아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자각한다.

<청도에서 김남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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